남극 탐험가 시라세마코토

<일본>2024-2-14남극 탐험가 시라세 마코토는 북극 탐험에 대한 열망이 강했지만, 1909년 9월 8일 미국의 피어리가 그 해 4월에 북극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또 영국 샤쿨통이 남극의 88번 23분에 도달했다는 소식도 들었다.그는 당초 바라던 북극의 대신 남극에 탐험지를 바꾸고 1910년 1월 29일 도쿄도 시나가와항을 출발하고 남극 탐험에 나선다.당시 전 세계가 처음 남극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남극에 원정대를 보냈다.시라세의 주요 경쟁자에는 노르웨이 암은셍(1872~1928)과 영국의 로버트·스콧(1868~1912)등이 있었다.시라세 마코토는 육군 중위로서 군 복무 기간(1893~1895)사이, 쿠릴 열도 북부 원정대에 참가하는 극지 탐험을 위한 다양한 경험을 배우다[1].1910년 대웅 백작의 도움으로 그는 남극 탐험을 위한 기금을 모아 18마력, 204톤, 선체는 목선이지만 철로 뒤덮인 스가이 미나미 마루는 준비된[2].그림45 시라세 신(1846~1946), 탐험선 하이난마루탐험대는 1912년 1월 로스해(Ross Sea)에 진입한 후 17일 로스 빙붕(Great Ice Barrier)에 상륙했다. 일부는 남쪽으로 나아가는 동안 하이난마루와 다른 일행은 에드워드 7세 랜드로 가서 측량과 과학 작업(기상 측량, 돌 모으기 등)을 했다. 남극점을 노렸지만 영하 20도 안팎의 혹한과 눈보라 속에서 두 대의 썰매가 갈라지는 사고가 발생해 9일간의 주행과 282km의 거리를 끝으로 포기했다[3]. 1912년 6월 탐험대는 큰 환영을 받고 일본으로 귀환했다. 간단히 요약한 일대기도 많지만[4], 더 자세한 내용을 얻으려면 남극기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5].그림 46 남위 80도 5분에 선 시라세 탐험대[6]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런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당시 시라세는 무슨 해도 또는 지도를 들고 남극으로 갔을까? 시라세가 들고 사용한 지도는 1907년 출간된 분방상 밀만국대지도 중 ‘남극도’였다. 같은 지도책에는 북극도도 있다[7].그림 47 1907년에 제작된 분방상밀만국대지도(분방상밀만국), 청목숭산당[8]시라세의 남극 탐험에 학술부장으로 동행한 다케다 데쓰타로가 제작한 그림 48개 지도는 해안에서 남극에 이르는 측량 지역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련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시라세 일행은 남극에서 탐험을 하면서 측량을 통해 지도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케다가 「1912.1.17 시라세」는 남위 80도 5분, 「1912 스콧」은 남위 85도 안쪽에 표기한 것으로 보아 일본이 항복한 후에 후환을 두려워하여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그림48 1912년 8월 지도[9]당시 일본의 측량 기술, 즉 지도 제작 기술을 알기 위해서는 근대 측량 기관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행히 강화도 조약(1876년)에서 한일병탄(1910년) 사이에 조선의 국토가 측량되어 지도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10]. 우리는 누가 ‘해저지도’를 만들고, 누가 ‘광케이블’을 설치했는지에 큰 관심이 없다. 그런데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알면 스마트폰만 잘 터지면 끝이라는 생각은 하수의 발상이다.그림49측량하는모습(조선토지조사사업보고서,1918년)[11]일본의 경우는 1869년 민부관 서무사 호적지도과를 설치하여 지적조사, 지적측량사업을 하였다. 이 조직의 출범으로 일본의 근대 측량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측량의 목적은 국토 관리 및 토지세를 걷기 위해서였다[12]. 1870년 광범위한 지도 제작을 위해 민부성에서 공부성이 독립하였다. 1871년 공부성 산하에 공학사와 측량사가 설치되었다. 공부성 측량사는 영국인을 고용해 도쿄부 도시를 처음으로 삼각측량을 했다고 하는데, 본인은 영국인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간 것이 아닌가 싶다.그림 50 지조개정측량도(1876년)[13]그림 50 지조개정측량도(1876년)[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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